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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2010년 목포 동계세미나 여행 후기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0.02.04
첨부파일0
조회수
1525
내용
회원 선생님들께

그동안 안녕하신지요?
이번 겨울은 말 그대로 嚴冬雪寒입니다.
지구온난화는 괜한 기우인 듯 ... ^^*

그동안 너무 적조했습니다.
여행을 다녀 온지 어언간 두 주일이 넘었는데,
새삼스레 후기를 쓰자니 계면쩍기도 하고,
또 게으름에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이번 여행에는 총 23분께서 참가해 주셨습니다.
여행을 떠나자면 언제나 마음이 설레입니다.
어릴 적 시골 국민학교 소풍 때도 그랬습니다.
소풍이라지만,
계란 후라이 덮은 쌀밥 한 도시락하고,
멸치 볶음 약간, 볶은 고추장 조금, 구운 김 몇 장,
그리고 칠성 사이다 한 병, 유과 과자 한 봉지 뿐이었지만,
언제까지나 행복한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여행 전날 국회사무처에 보낼 학회 1년 살림살이 보고서 쓰느라 밤을 거의 새우고,
안사람 재촉받으며 허둥지둥 택시타고 내리다 장갑을 잃어버렸습니다.
저만 정신이 없었던 것은 아닌 듯 합니다.
김은실 선생님은 코 앞에 관광버스 놔두고,
거의 1시간여를 헤매셨다는...
다 제 불찰입니다. ㅠㅠ
3호선 2번출구로 나오면 미니스톱이 보인다고 안내서에 썼습니다만,
그게 지도상으로만 그렇고,
현장은 큰 벽이 가로막혀 있더군요.
김은실 선생님 안내하느라 저도 속이 탔습니다만,
김샘 역시 너무 지쳐서 그냥 집으로 돌아가려고도 생각하셨다고 합니다.
김은실 선생님, 죄송합니다.

학회의 원로이신 양승태, 이종은 선생님도 오셨고,
이제 모든 분들이 오셨으니까 기분좋게 출~발~~~~

그런데 톨게이트 못미쳐서 전화가 왔습니다.
벌써 떠났냐는 장인성 샘의 화급한 목소리....
아뿔사!
그러고 보니 지난 밤 장샘께서도 참가하시겠다는 전화를 받았는데,
명단에는 올리지 않았던 것이 사단이었습니다.
장샘께서는 어차피 일도 있고,
그만 이참에 집에 돌아가시겠다고 ....
휴게소에 차를 세워 놓고,
담배 한 대 피우면서 장샘께서 택시타고 오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장샘께서 오셨습니다.
드디어 진짜 진짜 출발!!!

호남 일대에 폭설주의보가 내려 전날까지 모두들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차갑고 청명한 푸른 하늘,
달리는 차창 밖으로 펼쳐진 하얀 설국.
순백으로 빛나는 설원 위에 고적한 소나무 몇 그루,
가지에 얹힌 눈을 이기지 못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 넘 아름다웠습니다.
모두들 맥주를 한 모금씩 마시면서 은세계에 취했습니다.

4시간여만에 드디어 목포대학교 도착.
목포는 처음입니다.
하상복 선생님께서 마중을 나오셔서 반가운 해후를 했습니다.
목포대학교 교정에 들어서는 순간,
학교는 보이지 않고,
뒷산만 눈에 들어오더군요.
낮지만,
너무 순하고 푸근해서 명산임이 분명했습니다.
僧達山이라고 하는데,
이 산에서 득도한 눈 푸른 스님이 많이 났다고 합니다.

먼 길을 달려온 도반들을 데리고
하상복 선생님께서 멋진 식당에 안내했습니다.
아스라한 섬들이 수묵화처럼 겹겹히 둘러싼 바닷가에,
동화에 나오는 성처럼 예쁜 식당이었습니다.
해당화는 붉게 피어 남도의 정취가 넘치고,
지난 며칠 간 내린 하얀 눈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었으며,
양파 잎이 푸릇푸릇 땅 위로 나와 있어,
그 풍경은 뭐라고 말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 학회의 <주객+가객>이신 장현근 샘은
홀로 잔뜩 흥이 났습니다.
세미나도 시작하기 전에 이 술 저 술 꽤 마셨습니다.

식후에는 기념 사진을 찰깍.
동심으로 돌아가 눈쌈도 한참 했습니다.
전경옥 회장님께서 장현근 쌤에게만 눈덩이를 던져서
회장님은 장쌤만 총애하신다고 했더니,
앞서가는 제 목덜미에 한 아름 눈을 안기셨습니다.
충성!!!

다시 목포대학교로 돌아와 세미나 시작.
주제가 <예술과 정치>니 남도의 풍취에 어울린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발표가 너무 심오해서 모두들 진땀을 빼며,
취중에 물경 세 시간여 동안 오락가락 논전을 거듭했습니다.
그 사이 박의경, 이화용, 김경희 샘이 광주와 서울서 도착하고,
홍태영 샘은 강의 때문에 대전으로 갔습니다.
바쁘신 중에 발표만을 위해 목포에 오신 홍쌤,
감사합니다.

저녁 역시 하상복 샘께서 근사한 횟집에 안내했습니다.
더 이상의 회는 없다!
정말 신선하고 맛좋은 회였습니다.
배불리 잘 먹고, 술도 기분좋게 마셨습니다.
그 사이 안외순 샘이 서천에서 도착하셨습니다.
혼자서 오신 게 아니라 귀염둥이 아들도 함께...
근데 이 이쁜 꽃남이 진짜 안 쌤 아들 맞는겨?
전 딸만 둘이라,
안사람에게 아들 하나 더 낳자고 했다가 타박만 받았다는....

숙소에 돌아와서,
학교 근처 술집에서 한 잔 더 했지만,
그날은 그냥 그렇게 지나갔습니다.
지난 여름 세미나 때 광란의 첫날을 생각하면,
이번 동계 세미나 첫날은 좀 평화로웠다고나 할까요.

이튿날, 아침은 숙소 근처 식당에서 했는데,
겉은 소박한 밥집이었지만,
맛은 훌륭했습니다.
양승태 선생님께서는 추어탕 두 그릇을 잡수셨습니다.
역시 팔도 맛중 으뜸은 호남이라....

서병훈 선생님은 일찍 서울 올라가셨습니다.
잠자리가 조금 불편하여,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침 식사후 목포 시내 관광에 나섰습니다.
목포대학교에서 시내까지는 차로 3-40여분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가늘 길에 초의선사 탄생지 팻말이 보였습니다.
그는 다산 정약용, 추사 김정희와도 교분이 깊었던 儒僧이었고,
<茶神傳>을 지어 한국 다도의 종조가 되신 분입니다.

지난 번 공지 때 말씀드렸습니다만,
목포는 19세기 4개의 개항장 중 하나입니다.
근대의 물결이 가장 빨리, 깊게 밀려 온 곳인지라,
그 유물이 시내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맨 먼저 간 곳은 일본 영사관 건물이었습니다.
100년도 넘는 풍상을 겪었고,
식민 통치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붉은 벽돌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건물은 늠름하고 아름다웠습니다.
한 때 부수자는 의견도 많았지만,
이렇게 저렇게 살아남았고,
지금은 용도를 결정하지 못해 비어 있었습니다.
흠이라면, 안내판의 일본어에 너무 오자가 많았다는 것입니다.

다음은 동양척식회사 건물....
건물 안에 목포 개항사와 일본의 식민통치를를 알려주는 사진을 전시하고 있습니다.
경찰서, 철도역, 다리, 은행, 수도, 소학교, 극장, 세무서 등등의 옛 사진들을 보니,
한국의 근대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또 조선이 왜 망했는지에 대한 소회가 절로 났고,
식민지 백성들의 참상을 보여주는 사진들을 보니,
나라 잃은 백성들의 슬픔에 가슴이 메었습니다.

다음에는 옛날 일본식 가옥을 개조한 찻집과
일본식 정원이 고스란이 보존된 이훈동 정원을 가 보았습니다.
그 세련됨과 견고함, 아름다움에 놀랐습니다.

눈요기를 끝내고 굴밥집에 점심 먹으러 갔습니다.
이 집 맛도 일미....
정말 호남의 맛은 너무 호사스럽습니다.
이러니 호남 남자와 함께 사는 팔도녀들이 살기 힘들 듯 합니다.

점심 식후, 한참을 달려 진도 대교를 건넜습니다.
진도대교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대첩을 거둔 울둘목 위에 걸려 있습니다.
울돌목은 울면서 돌아가는 목이라는 뜻입니다.
과연 해남과 진도 사이가 병목처럼 매우 좁고.
해류가 소용돌이치 듯 거세게 소리내며 흘러가는 것이 눈에 똑똑히 보였습니다.
해남쪽으로는 전라우수영의 옛 자리가 있습니다.

잘 알려진 바처럼 원균이 칠천량 해전에서 판옥선 160여척을 잃고 전사한 뒤,
충무공은 백의종군에서 풀려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했습니다.
그러나 남은 배는 12척+1척 뿐.
조정에서 수군을 해체하라고 지시하자,
충무공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전선이 남아 있나이다."라고 말하고,
전투에 앞서 병사들에게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요, 죽고자 하면 살 것이다"(必死卽生, 必生卽死)
라는 유명한 연설을 했다고 합니다.
13척으로 133척과 싸웠으니,
가히 죽음을 무릅쓴 전투였다고 하겠습니다.
전투 중 겁을 먹은 중군장 첨사 김응함과 거제도 현령 안위의 배들이 물러나려고 하자,
그들을 불러 "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라고 엄책했고,
충무공이 탄 기함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참으로 대장부의 기상이고, 충군애국의 남아라고 하겠습니다.

진도대교를 지나니
진도군 가이드를 하는 미세스께서 차에 오르셨는데,
입심좋은 걸쭉한 안내에 할 말을 잃었습니다.

시간이 없어 장관이라는 백조도래지에는 못갔습니다.
다음은 삼별초의 항거지였던 용장산성.
가는 길에 가이드가 산기슭의 한 마을을 가르켰는데,
동족마을임에도 6,25 때 두 패로 나뉘어 수백명이 죽고 죽이는 참화를 겪었다고 합니다.
이 아름다운 남도의 바닷가에서,
무슨 고매한 이념과 무슨 깊은 원한이 사무쳐 그런 일이 일어났을까?

용장산성은 골짜기에 있었습니다.
그닥 깊지 않은 골짝에
돌로 8첩 계단을 쌓아,
건물을 지었다고 합니다.
고려의 왕궁 만월대가
송악산 아래 경사지를 깍아 계단식으로 지은 것이니,
이것을 모방한 것입니다.
일종의 정통성 경쟁이겠지요.

계단을 걸어올라 맨 위에 가보니,
목포대학교 고고학 조사단이 매운 겨울바람을 맞으며 발굴에 여념이 없었습니다.
파랗게 언 얼굴에 발간 코를 하고,
낡은 기와 조각을 보물 다루듯 하는 모습들을 보자니,
조금 하릴없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역사가 무언지...
700여년도 더 지난 이 때,
찬 바람만 잔설을 핥고 지나가는 이 좁은 골짝에
창검을 들고 새 왕조의 기둥을 세우고자 했던 옛사람들.
1271년 여몽연합군이 이곳을 공격하자 배중손은 전사했고,
왕으로 추대된 승화후 왕온은 고개를 넘어 탈주하다 참살되었다고 합니다.
진도 읍내를 가르지르는 냇길은
그 날 삼별초군이 결사적으로 탈출을 기도하다 죽어간 길이라고 ....

700년전 도읍지를 匹車로 돌아도니
인걸은 간데 없고 삭풍한설만 울고 있네
오호라, 인간세의 천일비사가
뜬 구름인가 하노라.

역사의 애상을 곱씹으며,
운림산방에 갔습니다.
운림산방 가는 길은 아스라히 바다가 보이고,
바닷길을 따라 길이 굽이굽이쳐 이어졌습니다.
운림산방에 도착하니,
뒷산이 또 먼저 눈에 들어왔습니다.
이 산은 참으로 독특하여,
그닥 높지도 않은데 산 머리에는 회갈색의 잔 나무만 있었습니다.
해풍 탓일까?
산 아래의 검은 색깔과 산머리의 회갈색의 조화가 아름다웠고,
온화하고 아늑하며, 깊은 정적이 산 아래로 스며드는 게,
마음을 어루만지며 가라앉혔습니다.
과연 조선 남종화의 氣節이 배인 곳이라 하겠습니다.
소치 허련 역시 김정희의 제자로,
시서화에 모두 능한 삼절이었다고 합니다.
추사의 제주 유배 시절에 배웠고,
1856년 추사가 작고하자 이곳에 내려와 평생 우거했습니다.
집은 작고 아담했지만,
뒷 산, 앞의 연못, 그리고 멀리 바다가 어우러져
깊고 고요한 기품이 넘쳤습니다.

시간이 있으면 서해 조 보러 팽목항에 가려고 했는데,
도저히....
세방낙조가 그토록 아름답다고 하던데...
어떤 시인인가 잘 기억이 안나는데,
서해 바다에 지는 붉은 낙조를 바라보며
소주 마시는 즐거움을 못 잊어 낙향했다고 하더군요.

저녁밥을 먹으러 진도읍내의 우래정으로 가는 길에,
이화용 선생님이 아쉽게도 먼저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우래정 해물찌게탕 맛은 그냥 그랬지만,
하루 종일 찬바람에 시달리고
공부에 지친 심신을 따뜻하게 녹여 주었습니다.
식후에 양승태, 이종은, 박주원 선생님이 또 서울로 떠나셨습니다.
여행 도중에 먼저 가는 거 참 안 좋은 듯 합니다.
괜히 마음이 허전하고 서운해지기 땜시....

식사를 마치고, 국립남도국악원으로 출발
이 프로그램은 장현근 선생님이 알려 주셨습니다.
어부인께서 가야금의 명인이신지라....

아~,
남도 소리와 춤은 참으로 아름다웠습니다.
뭐라고 말을 못하겠습니다.
공연을 보는 동안 숨이 막혔습니다.
그리고 이 좋은 소리를 한 구절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
제 인생이 참으로 유감이었습니다.
옛 것이 점점 좋아지니 저도 이를 드는 모양입니다.

밤 늦게 다시 차를 타고 진도대교를 건너자니,
술먹자는 주객들의 소리가 아우성이었습니다.
남도에 왔으니 홍어에 막걸리를 안 걸칠 수는 없겠죠.
이번에도 하상복 쌤이 근사한 주막을 안내하여,
홍탁에 취하고,
취흥이 도도하여
다시 노래방으로 진~격~~~
몇 시간 동안 뒤엉켜 노래와 사람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람이 노래되고, 노래가 사람되어 즐겼습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사상학회가 아니죠.
숙소로 돌아와서 또 통음에 통음을 거듭했다는....
저는 마름 노릇하느라 지쳐서 그냥 모로 쓰러졌는데,
나머지 쌤들께서는
밤새도록 지구의 모든 술을 마셨다고 합니다.
아침에 일어나니 완전 폐허였습니다.
고희탁 쌤은 머리를 긁적이며,
"내가 지난 밤에 무슨 말을 했다냐?" 하시고,
박혁, 오수웅 쌤은 아예 몸을 가누지 못할 뿐만 아니라
눈도 반 이상은 뜨지도 못하시더군요.
서규환, 장현근 쌤은 말할 것도 없고요.
이원택 쌤만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있더군요.

착한 김경희 쌤은 지난 밤에 안외순 선생님 숙소에 모셔다 드리랴,
온갖 궂은 일 하시다가
김동하 박사님 결혼식 가신다고 새벽 일찍 길을 나섰습니다.

지난 아침 했던 곳에서 해장했습니다.
그집 여주인은 눈매가 서글서글하고,
뭐랄까 참 선함이 얼굴에 잔잔히 깔린 분이셨습니다.
추어탕 조금만 더 달라고 하면 한 그릇을 통째로 가져다 주시고 ...

폐인이 다 된 쌤들을 차에 태우고,
유달산에 올랐습니다.
유달산 등정에 앞서,
가이드 하시는 분이 남자만 가서 보라고 하는 델 가보았더니
레이디 거시기 같은 형상의 나무가 있더군요.
이거 유달산 儒자가 놀랄 입니다.

유달산은 낮지만 험한 산이었습니다.
지난 며칠 동안 내린 눈이 녹았다가 다시 얼어서
정상까지 가는 길은 험로였습니다.
산 중턱에 儒仙亭이 있는데,
현판은 해공 신익희 선생의 필적이었습니다.
이곳에 유선정이라는 명물 가이드 할매가 계셨는데,
원조 남도 사투리로 사설을 현하지변으로 좔좔 늘어놓으시는게,
그냥 가락만 붙이면 판소리 한 판이었습니다.
팔순도 넘으신 할매가,
이 추운 날에 이런 가파른 곳까지 올라와서,
누가 시키지도 않는데,
제풀에 흥이 나서 사설을 하시는 걸 보니,
사람이 제 신바람으로 산다는 게 맞는 말 같습니다.

간을 졸이며 겨우 겨우 산을 내려와보니,
올라가기를 포기한 쌤들과
먼저 산을 내려온 장현근 쌤이 해장술을 하고 있었습니다.
사상학회 쌤들은 별종 인류 혹은 아바타가 아닐런지...

오수웅 쌤은 그 사이 조용히 서울 가셨다는 ....

남도의 마지막 식사는 세발 낙지 비빔밥.
빨간 고추장이 엄청 매울 것 같아 지레 겁을 먹었지만,
그게 또 맛이 기막혔습니다.
홍주로 또 반주.

식사후 하상복 선생님과 작별했습니다.
차창 밖에 서서 손을 흔들고 계신 하 쌤을 보니,
지난 사흘이 몇 년인 듯
아쉬운 마음 뿐.
삶에서 좋은 모든 것들은 짧은 것.
삶이 그대를 지나쳐간다 해도
노여워하거나 슬퍼하지 말라.
유달산 기슭에서 <목포의 눈물> 이난영의 기념비를 보았던 바,
아무래도 신파조에 살짝 감염된 듯 합니다.

목포를 뒤로 하고 서울로 달렸습니다.
상행중의 남도 평원에는 여전히 하얀 눈이 가득했고,
멀리 수려하고 장엄한 산세가 아름다웠습니다.

드디어 서울 도착.
지하철 3호선 역에서 사요나라!

즐겁고 추억에 남을 남도여행이었습니다.

전경옥 회장님, 푸근하게 회원들을 감싸 주셔서 좋았습니다.

하상복 선생님, 다시 한 번 깊이 감사드립니다.
음식도 너무 맛있었고, 잠자리도 편안했습니다. (여자 쌤들만...)
그리고 조교 박정석 군의 친절하고 충직한 봉사에도 감사드립니다.
숙박비와 학교 시설 이용 비용은 하상복 선생님과 목포대학교에서 전액 부담하셨습니다.
목포대학교의 후의에도 재삼 감사드립니다.

2010년 2월 4일

한국정치사상학회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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